근현대사
제임스 하우스만과 백선엽이 자행한 끔직한 비극속 목숨 부지한 박정희와 살아남은 자의 슬픔
여순사건 73년, 드러나는 역사의 진실
1948년 10월 여수와 순천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의 실체가 73년 만에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최근 제정된 특별법과 함께 그동안 숨겨졌던 역사적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당시 상황과 그 이후의 영향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군인들의 양심적 거부에서 시작된 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당시 14연대 군인들은 자국민을 상대로 한 진압 작전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튿날인 10월 20일, 14연대 반군이 여수를 점령했고, 이어 순천과 인근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정부는 곧바로 대규모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10월 27일 여수가 수복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이후 대대적인 좌익 세력 색출 작업으로 이어졌다.
단순한 반란을 넘어선 복합적 배경
여순사건은 단순한 군사 반란이 아닌, 복합적인 사회·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 친일파 청산 실패, 극심한 경제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반공 국가'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했고, 이후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졌다.
'대살'의 비극,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
여순사건 과정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이었다. 특히 '대살'(代殺)이라 불리는 처참한 관행이 있었다. 용의자를 찾지 못하면 그 가족을 대신 처형하는 방식이었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백부인' 사례는 이러한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들 대신 어린 딸이 끌려가 희생된 이 사건은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산동에 가'라는 노래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뿌리가 된 사건
여순사건은 한국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해병대와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등 국가 체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레드 컴플렉스'라 불리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다.
한편, 여순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 경력과도 연관돼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토벌대 일원으로 참가했다가 좌익 혐의로 체포됐지만, 후에 미군 정보 장교 제임스 하우스만의 중재로 석방됐다는 증언이 있다.
73년 만의 특별법 제정, 그러나 여전한 과제
2021년 6월, 국회는 '여순사건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73년 만에 이뤄진 이 법 제정으로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여순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차가 존재한다.
최근 한 정치인의 "여순사건은 북한의 지령에 의한 반란"이라는 발언이 논란이 된 것처럼, 여전히 이 사건을 둘러싼 해석에 차이가 있다. 이는 한국 사회가 과거사 청산과 역사 인식에 있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해와 통합을 향한 과제
전문가들은 여순사건의 진실규명이 단순히 과거의 일을 들추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의 통합과 미래 지향적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이 사건이 남긴 지역간, 이념간 갈등의 해소가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여순사건 73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 사회는 이 비극적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극복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여순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