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7일과 2024년 12월 3일, 44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두 개의 계엄포고령이 겹쳐진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공개한 계엄문건은 5·18 당시 광주 시민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포고령을 현대적으로 표현만 바꿨을 뿐, 그 본질은 고스란히 복제했다는 충격적 사실을 보여준다.
80년 5·18의 망령을 되살리려 한 문건
[80년 포고령] "본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
[24년 포고령]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처단한다"
박안수 총장은 지난 5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처단'의 의미를 두고 의원들과 설전을 벌였다. "처단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법적으로 처벌하여 단죄하는 것"이라며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계엄문건은 박 총장의 해명이 거짓이었음을 드러낸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처단'은 곧 '살상'을 의미했다. 계엄군은 이 한 단어로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을 빼앗았다. 4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군 수뇌부는 이 살벌한 단어를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다. 이는 우리 군이 5·18 광주의 비극적 교훈을 전혀 새기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더 강화된 정치활동 금지와 언론 통제
[80년 포고령]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며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한다"
[24년 포고령]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오히려 2024년 포고령은 80년보다 더 광범위하고 강력한 통제를 꾀했다. 80년 포고령이 "모든 정치활동"이라고 모호하게 표현했다면, 이번 포고령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는 헌법기관인 국회와 지방의회의 기능까지 정지시키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특히 국회에 대한 통제는 삼권분립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언론 통제도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며 검열을 노골화했다. 이는 군이 언론의 감시견 역할을 원천 차단하고 모든 정보를 통제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민주주의 근간인 의회 기능과 언론 자유를 동시에 마비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이번 포고령은 80년 신군부의 통제를 뛰어넘는 반민주적 조치였다.
저항권마저 봉쇄하려는 시도
[80년 포고령]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체 금한다"
[24년 포고령]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전공의...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
파업과 집회를 원천 봉쇄하는 내용은 44년 전과 판박이다. 80년 신군부는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모든 노동자의 저항권을 짓밟았다. 2024년 포고령은 더 나아가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라는 추상적 문구로 저항의 정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집단행동을 '사회혼란'으로 규정했다. 특히 "전공의...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며 의료계 집단행동을 특정해 겨냥했다. 이는 80년 신군부가 '공공질서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탄압했던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모든 저항의 길을 차단하고 '처단'이라는 극단적 조치로 위협하는 방식까지 동일하다.
'반국가 세력' 낙인으로 광주의 비극 재현 시도
[24년 포고령]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이라는 조항은 1980년 신군부의 논리를 그대로 복제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 시민들을 '폭도'와 '불순분자'로 몰아 학살을 자행했다. 이번 포고령은 '반국가세력'이라는 모호하고 자의적인 용어로 누구든 잠재적 처벌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했다. '체제전복세력'이라는 극단적 용어를 동원해 시민들을 '선량한 국민'과 '반국가세력'으로 이분화한 것이다. 특히 "선량한 일반 국민들"이라는 수식어를 써서 저항하는 시민을 '불순분자'로 낙인찍으려 했다는 점에서, 80년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던 그 논리를 그대로 따랐다. 이는 정당한 저항권 행사마저 '반국가 행위'로 규정해 탄압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헌법도 무력화하는 초법적 권한의 실체
이번 계엄문건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계엄법 제9조를 근거로 영장 없는 체포와 구금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이는 법관의 영장 없이는 체포·구금할 수 없다는 헌법 제12조를 정면으로 무력화하는 조치다. 계엄군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쥐여주는 이 조항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무차별 연행과 폭력, 살상을 자행할 때 활용했던 바로 그 법적 근거다.
더욱 위험한 것은 기만적 수사다.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는 문구는 80년 신군부가 "국민의 일상생활과 정상적 경제활동의 자유는 보장한다"며 시민들을 기만했던 말과 일치한다. 이는 저항하는 시민은 '선량하지 않은 국민'으로 낙인찍어 탄압하겠다는 의도다.
특히 문건은 "긴급한 상황"이라는 모호한 조건만 충족하면 대통령 승인 없이도 계엄사령관이 선조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사실상 계엄사령관에게 백지수표를 쥐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80년 광주에서 계엄군이 무소불위의 권한으로 시민을 학살했던 그 비극적 역사를 잊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위험천만한 조항들을 담을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