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한동훈이 부를 물려받을 때, 나는 납을 대물림했다"

AMK노동자의 일침

2024-03-27 16:02:07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부친 한무남 씨가 한국 대표로 있던 AMK(한국 어프라이드 마그네틱스)의 노동탄압 사례가 뉴탐사를 통해 보도된 후, 1990년부터 햇수로 7년간 서울 구로공단에서 AMK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는 진달래(가명) 씨가 제보가 접수됐다. 뉴탐사 보도를 접한 후, 당일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진달래 씨는 자신이 겪은 부당한 탄압 사례를 언젠가 세상에 꼭 알리고 싶었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그는 당시 상황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며, 노동자를 시켜 노동자를 탄압하게 했던 한국사장 한무남 씨를 똑똑이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동훈 위원장은, 자신이 어떤 돈으로 공부했고 누리고 있는 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진달래 씨와 나눈 일문일답.

- 한동훈이 AMK한국 사장 아들이란 보도보고 연락을 주셨는데?


맞아요. 피가 끓었어요. 보도를 본 후 너무 화가 나서 잠도 못 잤어요.


-어떤 지점에서 가장 화가났나?


제가 90년 4월 2일 그 회사를 입사를 하고 한 보름 정도 됐을 때 파업을 했었어요. 제가 파업에 동참하게 된 계기는 같이 일하는 그 남자 노동자들이 언니들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고 질질 끌고 가고 때리고 너무 놀란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릴까, 제가 안경을 그때도 꼈었는데 나도 모르게 안경을 집어 던지면서 ‘이 개새끼들아’ 그런 거예요. 그랬더니 정말 덩치 큰 남자가 와서 ‘이런 미친년이’ 이러면서 제 허리춤을 딱 잡고 저를 정문에다가 문을 열고 집어던졌어요. 이렇게 들고.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겠어요?


- 그때가 20살?


딱 20살 제가 싸대기를 한 대 맞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랬어요. ‘우리 아빠도 안 때리는데 당신이 뭔데 때리냐’고 ‘당신이 왜 때리냐’고 그랬어요. 그게 제가 꿈꾸는 삶과 다른 삶을 살게 된 계기가 된 거죠. ‘내가 이렇게 싸대기를 맞을 이유가 없고, 이런 세상을 내가 왜 살아야 되지?’ 그러면서 이제 분노에 차기 시작했죠.


AMK는 AMC라는 미국 다국적기업이 투자한 100%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컴퓨터 부품을 제조하는 회사였다. 한국에는 임금수준이 낮던 1968년부터 진출해 있었다. 한동훈의 부친 한무남 씨가 대표였고, 작은아버지 한이남은 공장장을 맡고 있었다. AMK 춘천과 청주, 서울에 공장을 두고 한때는 7천여명의 직원을 고용했을 정도로 고용창출에 이바지한, 선망의 기업이었으나, 198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저임금으로 이윤을 창출하며 노동자들의 피고름을 짜내기 시작했고 근로기준법을 위반, 90년대 노동탄압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90년이면 청주나 이런 데서는 이미 노동조합 생겨났고 서울도 이미 (노조가) 있었을 때인가요?


서울은 이제 막 생겼을 때 원래는 서울에서 제가 기억하기로 서울에서 먼저 하려고 했는데 그걸 알아차린 거예요. 회사에서. 그래서 청주에다가 거의 페이퍼 노조를 만든 거죠. 그래서 민주노동조합이 아니라 회사 어용노조를 만들었다고 제가 기억이 나요. 그래서 우리가 본부가 아니라.

진달래 씨는 당시 상황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진달래 씨가 회고한 AMK 구로지역에서 벌어진 노동탄압 사례도 상상 이상이었다. 구타에 감금은 기본이었고, 임신한 여성에 대한 폭력도 이어졌다. 심지어 쿠타당하는 현장을 카메라에 찍는다는 이유로 손에 접착제를 부어 버린 적도 있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기억나세요?


여자들만 운동장에 다 세워놨어요. 운동장 한가운데. 그리고 덩치 큰 구사대들이 우리를 삥 둘러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거든요. 근데 우리는 빨간 티를 입었어요. 지금 제가 빨간 티를 입고 나왔는데 ‘우리는 하나다’라는 문구가 적힌 티를 입고 운동장에 다 섰어요. 그런데 “어떤 년이야?” 욕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소리) 지르셨던 분들도 사실은 노동자였죠?


노동자예요. 이간질 시켜가지고 그렇게 만든 거죠. 그래서 이렇게 움직였더니 움직인 사람을 끌고 나가는 거예요. 때리고. 그리고 우리가 이제 그 파업하면서 배웠던 노래를 그냥 막 부르는 거예요. 거의 복화술이죠. 누가 시작하는지 모르게 가운데서 누가 ‘흩어지면 죽는다’ 그러면 옆에서도 모양은 안 보이면서 노래를 계속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내 생각은 저는 약간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라 너무 그 상황이 웃긴 거예요. 너희가 아무리 그래 봤자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한다. 노래라도 부를 거다. 그래서 계속 노래를 부르다가 연결되지 않는 노래 있잖아요. 그러니까 같은 노래가 아닌데 다른 노래 후렴을 갖다 붙이고 그러니까 킥킥대고 막 웃었어요. 그러니까 또 웃는다고 질질 끌고 가네. “어떤 년이 노래 시작해서 어떤 년이 웃었냐”고 그러면서 “저년이 입벌렸어” 입을 다 보고 다니는 거예요. 와 사람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구나.


또 엄청난 일이 벌어졌었는데 중간에 이제 또 현장에서 싸움이 있었는데 결혼한 언니가 임신을 했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머리끄댕이 자꾸 그 벽에다가 그분을 이게 벽에다 밀치는 거예요. 임신한 사람이 한두 분 계셨는데 그런 분들을 그렇게 때렸어요. 의자 던지는 거는 그냥 일상이었고 욕하고 때리고 이런 건 일상이었고 그중에 이제 그 카메라로 찍던 언니가 있어요. 그때 그 우리가 쓰는 물품 중에 순간접착제가 있었거든요. 그 언니가 카메라를 들고 찍고 있는 그 상황을 찍고 있는데 그 손에다가 부은 거예요. 그 카메라하고 그 사진기하고 그 언니 손하고 붙어버린 거야. 완전히 카메라가 막 지지지지 타면서 막 그걸 봤어요. 붙어가지고 그거를 떼어냈는데 장난 아니었다니깐요. 근데 아가씨였어. 그 언니도 엄청나게 그건 막 소리를 지르는데 괴로워서 이 언니가 막 소리를 지르는데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이게 달라붙었으니까 플라스틱이잖아요 그게 손이 완전히 딱 달라붙은 거예요.

아, 이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잖아요. 20살 때 제가 느꼈던 건데 ‘이런 세상이었나 세상이?’ 세상에 이런 게 있다는 생각을 못 했고 이렇게 부조리한 세상을 나는 알려야 되겠다.


진달래 씨는 본래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다고 했다. 천성이 밝고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그는, 연예인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딱 한 달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들어간 그곳에서 목격한 상황은 지옥 그 자체였고, 혼자 그 지옥을 탈출하면 그런 세상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줄 것 같은 생각에 꿈도 접게 됐다고 한다.


꿈을 접은 진달래 씨는 AMK와 구로공단에서 자신의 재능을 살려, 자신이 목격한 현장을 기록하고, 기록한 것을 연극으로 올려 노동자들을 위로하고 독려하는 일을 했다.


-원래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고요?


네. 저는 원래 연예인이 되고 싶어서 노량진에 학원도 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파업하면서 너무 인간 이하의 짓들을 많이 하니까 ‘내가 대학 가서 뭐 하지?’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이 많고 나도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는데 내가 대학 가서 뭔가를 배워서 뭔가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얼마나 죄책감에 살까, 그걸 저버리고 내가 그만두고 나왔더라면’ 그런 생각이 드니까 도저히 못 나오겠더라고요. 그래서 학원을 그만두고 그때부터 제가 당했던 그런 일들을 그냥 썼어요. 그리고 재연을 했어요.


-그러면서 당시 했던 일이 문화운동이었다고요?


네. 내가 나가서 뭐 연예인이 되고 그 탤런트가 되기보다는 여기에서 우리의 일을 나의 일을 대변해서 우리의 이 억울함을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제가 정리 해고될 때까지 96년도 3월 31일 정리 해고될 때까지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고 살았죠. 그리고 제가 겪은 일들을 쓰고 회사에서 연극을 하다가 구로 지역에 연극회가 생겨요. ‘해방으로 전진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해방 전사’ 그래서 매년 가을에 공연을 했었어요. 참사랑 공연을 하고 동국대 한양대 이런데서 몇천 명이 보고 그랬죠. 그리고 그때 대본 쓸 때마다 지역에 어떤 것들이 문제가 되고 어떤 사안이 있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어떻게 당하고 있고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그런 것들을 고민 많이 하면서 지하에서 연습하고 또 새벽에 출근하고 또 집에 갔다가 저녁에 와서 잠깐 또 새벽에 새벽까지 연습하고 또 잠깐 눈 붙이고 또 아침에 출근 투쟁하고 일상이 맨날 투쟁인 거예요. 지하방에 살면서.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중간에 엄청 힘들었죠.


-그러면 얼마나 오래 그런 생활을 하신 거예요?


90도 96년도니까 7년이고 햇수로는 7년이고 만 6년이죠. 이틀 모자란 6년을 정말 조마조마하면서 오늘은 아침에 출근 투쟁을 하면서 오늘은 어딜 맞을까 어딜 맞을까 오늘은 누가 맞지 오늘은 어느 부서에서 터질까 조마조마한 날들이었지요.

한 달 해보려던 아르바이트였지만, 햇수로 7년동안 떠날 수 없었다는 진달래 씨. 서울지부 노조원 1600명 중 마지막까지 남은 여성 노동자 6명, 그중 한 명이 바로 진달래 씨다.


회사는 노동조합을 탈퇴하면 아파트 분양권을 주겠다며 회유도 했고, 그 회유에 노동조합을 탈퇴한 이도 부지기수였다는데, 무엇이 진달래 씨로 하여금 그 모진 공간에서의 시간을 견디게 했을까. 다시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근데 사실 꿈도 있으셨고 공장이나 다른 데를 갈 수도 있는데 왜 거기서 계속 그렇게 투쟁을 하셨을까요?원래 잠깐 알바하려고 하셨던 거잖아요


길어야 한 달


- 싸우다가 나가는 사람도 많이 보셨을 것이고


많이 봤죠. 길어야 한 달. 그래서 나는 학원비 좀 만들어서 난 연예인이 돼야지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내가 여기를 나가면 누군가 또 채울 텐데 그 사람은 또 나 같은 대우를 받겠지?나처럼 맞고 나처럼 감시 대상이 되고 그런데 ‘너 편하자고 나가면 다른 사람이 여기 들어와서 그렇게 하는 걸 네가 볼 수 있겠냐’ 내가 물어봤어요 스스로 내 양심상 안 되는 거예요

네가 먼저 알았으니까 네가 먼저 해결을 해라 이건 너의 일이다 내가 20살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 그러면 내가 여기서 나가면 내 조카든 내 친구 동생들이든 누구든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이런 대우를 받을 텐데 나로서 끝내자 끝장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 접었죠. 다 접고 이런 대우 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게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너무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그 자리를 지킨 거죠.


- 간혹 좀 억울하고 후회되진 않으세요?


몇 번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 너무 재주가 많으셔서 여기저기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도 많았을 것 같아요 또 기회가 많은 나이잖아요.


그렇죠 그때 영화를 누가 하자고 한 사람도 있었고 책을 좀 쓰자고 한 사람도 있었고 제가 연극을 계속하니까 책을 쓰자고 한 사람도 있었고 그러려면 노동조합을 그만둬야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의 어떤 안락함을 위해서 내가 그 노동자들을 버린다. 노동조합을 그만둔다고 하는 거는 양심상 안 돼요 양심상 안 돼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거 끝까지 하자 끝까지 해서 다시는 이런 나 같은 대우를 받지 않게 해야겠다 그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죠


진달래 씨는 그곳에서 납땜을 했다.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인식도 매우 미비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일하면서 건강을 잃은 것이 가장 억울한 일이라고 했다. 어디에도 하소연 할 곳이 없는 현실, 무엇보다 자식에게 납을 물려주었다는 미안함이 크다고 했다.


-그곳에서 주로 한 일은 뭐예요?


케이블을 연결하는 그 납땜을 했는데 현미경을 보고 납땜을 했는데 납에 대한 어떤 인식 자체가 이게 나쁜 거라고 인식 못 한 거예요. 납땜하면 하얀 연기가 나는데 그걸 그냥 내 코로 하얀 연기를 그냥 코로 마신 거죠.


- 그거 닦는 기계나 이런 것들이 지금은 쓰지 못하게 하는 화공약품이더라고요


그런 거였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래서 우리가 또 싸움한 게 필터라도 줘라.


-필터가 없었어요?


없었어요. 이렇게 다 우리 코로 마시니까 안 된다. 필터라도 줘라. 그것 때문에 또 환풍기를 좀 달아줘라. 그것 때문에 엄청 싸웠어요. 그래서 까만 거 하나 이렇게 줬어요. 그래서 거기 걸러졌긴 했지만 다시 또 오는 거죠. 다시 또 오는 거죠. 근데 그때 좀 우리가 정말 좀 더 똑똑하고 좀 더 노동조합의 힘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작업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좀 몸이 안 좋은데 언제 중금속 검사를 했더니 몸에 납이 되게 많은 거예요. 그래서 그날 진짜 너무 화가 나서 잠을 못 자고. 그 회사가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어디 싸울 수 있는 청구할 수 있는 데도 없고 저희 큰 아이가 또 검사했더니 납이 되게 많은 거예요. 몸에. 그러니까 피로감을 빨리 느끼는 거죠. 회복도 안 되고 근데 그게 가장 억울해요.


-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 일하셨던 분들 대부분이 그럴 수 있을 텐데요.


맞아요. 맞아요. 아주 수 많은 노동자들이 그냥 노출된 거죠.


-더구나 노조활동까지 하셨으니, 요주의 인물이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간부가 아니었거든요 일반 조합원이 항상 그렇게 싸움을 하니까 항상 제 뒤에 항상 (덩치 큰 사람이) 서 있었어요. 작업할 때도 그냥 와서 감시 대상이야 감시 대상. 그러니까 준법 투쟁하지 않더라도 감시 대상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하고 나는 누구보다도 물량을 잘 뽑았으니까 할 말이 없었던 거죠. 회사에서는 노동조합 활동했던 사람들 좀 심하게 좀 잘하는 사람들은 항상 지하에 남자들만 있는 그런 부서로 꼭 보내요.


- 거기는 뭐 하는 부서인데요.


브라켓이라는 부서였는데 이제 처음에 신주가 와서 그걸 깎고 어떤 형태를 만들어주면 거기다가 케이블을 붙이고 이렇게 하는 그런 공정들이 있어요. 근데 그런 기계 그런 기계랑 그런 신주가 있는 부서가 지하였는데 다 남자들만 있고 기계만 있는 그런 부서고 화학약품을 되게 많이 쓰는 부서였는데 거기로 절 보낸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저도 몇년 일을 했죠. 그래서 거기는 특수 건강검진을 받아요. 특수 건강검진을 받고 그랬어요 근데 개념이 그때는 그렇게 많지 않아가지고 뭐 괜찮겠지 괜찮겠지만 하고 별로 몰랐죠. 그러니까 나중에 몸이 되게 안 좋고 힘든 게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때 납땜하고 그렇게 지하에 가서 그렇게 그 화학물질 만지고


- 환기도 잘 안 됐을 텐데


안 됐죠. 완전히 룸 안에 또 룸이 있었던 거예요. 룸 안에 룸


노동환경도 열악한 곳에서 고된 일을 하며 노동조합 활동으로 감시에 빨갱이 몰이까지 당해야 했던 진달래 씨. 서울공장이 철수하기 전 2년간 장외투쟁까지 해야 했다. 진달래 씨의 꽃다운 20대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당시 사측의 회유와 압박도 심했다고 하던데


파업하는 장면을 찍어가지고 집집마다 다 보낸 거예요. 저희 아빠한테도 보냈죠. 그래서 어느 날 전화를 했더니 ‘아이고 회사에서 사진이 왔다’ 그러면서 ‘네?’ 그랬더니 ‘살살 해라’ 그러시더라고 아빠가. 그래서 제가 뭐라고 그랬냐 하면 ‘아빠 앞에서 하면 선동자고 뒤에서 하면 배우 조정이고 가운데 있으면 중간 세력이래’그랬더니 막 웃으시더라고.


- 아버지가 의식이 있는 분이셨네요


시골 분이셨는데도 그런 거에 대해서 나쁘다고 말씀 안 해주시고 ‘살살해라 몸 다치지 않게 살살 해라’ 그렇게 하셨어요.


- 어떻게 보면 그때 당시에 그 싸웠던 그게 있었기 때문에 저희도 그 혜택을 보는 사람들인 거잖아요. 


맞아요. 맞아 저희도 87년 88년도에 열심히 투쟁했던 선배 덕에 저희가 그나마 노동조합도 만들고 싸움도 하고 또 거리에 나가서 힘도 얻었고 중간에 저도 너무 몰리고 너무 맞으니까 전태일 열사가 딱 생각이 나더라고요. 이래서 분신을 하셨구나. 어찌하지 못하니까. 이 나약함에 나는 뭐를 할 수 있을까 근데 딱 전태일 열사가 생각이 났어요. 제가 공장 다녔을 때 그 기계 뒤에 아주 좁은 공간이 있어요. 근데 제가 쉬는 시간에 거기가 좀 따뜻하거든요. 내가 몸집이 작으니까 거기 들어가서 전태일 열사 평전을 읽었어요. 그 안에 들어가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얼마나 울었나 몰라요. 얼마나. ‘이래서, 이래서 이렇게 가셨구나’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됐어요.


AMK 청주 본사까지 한국에서 철수한 건, 2000년. 

90년대 악랄하게 노동자를 탄압할 당시 한 해 미국 주주들에게는 120억 배당잔치를 했던 사실이 1998년 조세심판원 결정문을 통해 확인된다. 그런데도 ‘노조 때문에 회사가 망한다’는 유언비어를 믿고 사측에 서서 같은 노동자를 탄압했던 노동자들과 싸워야 하는 일은 참으로 지치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버틸 힘은 연대의 힘이었다고 회고한다.


- 미국 쪽에 진짜 주주들 배당한 거 배당 장치가 장난 아니었잖아요


저거 내 돈인데 이런 생각 진짜 내 정말 내가 몸 썩어가면서 아파가면서 만들어낸 돈인데 저들 주머니에 찼구나. 나는 달랑 몇 푼 갖고 떨어지고. 내 몸이 이렇게 아픈데 나는 진짜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하나. 보상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은 거예요. 내 몸 이거 돌려놓으라고, 내 몸에 중금속부터 빼 달라고 정말 부여잡고 싶다니까요


-사측에서 행동하셨던 노동자들은 회사가 정말 어렵다고 믿었을까요?


놀아 난거죠


제가 기억하기로는 마지막에 너무 회사가 어려워서 물가도 그렇고 중국으로 갈 거다, 인건비가 너무 비싸서 그래서 한두 달 동안 해고 투쟁을 했죠. 해고 투쟁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회사에서 얼마나 야비하게 했냐면 노동조합에 가입했던 사람만 마지막 정리하는 돈을 주겠다 이렇게 얘기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를 때렸던 관리자들이 낙동강 오리 알이 된 거예요. 그럼 그 사람들은 그 돈을 못 받는 거예요. 그래서 회의를 열게 되었는데 이 돈을 받으려면 노동조합에 가입을 해야 되는데 그 사람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가 없는 상황이잖아요. 우리를 그렇게 때렸는데 마지막에는 적과의 동침이 된 거예요. 그 공장 안에서 적과의 동침이지.


자기도 뭔가를 받으려면 회사에서 버림을 받았으니까 믿을 게 이제 노동조합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랑 같이 싸움을 하게 되고 같이 밥을 해 먹고 우리랑 같이 설거지를 하고


- 그것도 참 못할 짓이네요


적과의 동치미였다니까요.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인가. 근데 한편 그들도 불쌍했죠. 그 노노싸움에 놀아나는 그들이 정말 그렇게 만든 그 회사 측에서 정말 야비하다.


- 사과를 좀 하셨을까 모르겠네요


마지막에 했죠. 미안하다고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다 받아주셨어요?


다 받아줬죠. 그래서 울면서 제가 그랬어요. 그동안 우리 너무너무 힘들었다. 우리 너무 많이 맞았고 너무너무 아팠고 우리끼리 싸움을 한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게 진짜 힘든 일인 것 같아요. 


말도 못 하죠. 그냥 뭐 우리 반장 우리 계장 우리 같은 부서에 그런 사람이 갑자기 주먹 들고 성난 얼굴로 날 때리고 머리끄덩이 잡아당기고 1~2년이 아니라 몇 년을 그랬으니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죠.


진달래 씨는 한동훈 위원장의 부친, 한무남 한국 사장을 기억하고 있을까.


- 기억나세요? 한무남


기억나죠. 얼굴이 약간 잡잡했어요. 그리고 약간 대머리였고 곱슬머리였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딱 보는 순간 야비하다 지독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딱 순간 들었어요. ‘저 사람이 사장이야’ 근데 느낌은 되게 좋지 않았거든요.


- 사장이 오늘 뭘 했나요?


주로 주로 우리는 현장에서 다 코 박고 열심히 납땜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 쳐다보거나 이러지는 않은데 저는 쳐다봤어요. 우리를 저렇게 힘들게 한 사람이 왔다고 어떤 사람이지 ‘이렇게 각자 일을 하세요. 사장 왔다고 쳐다보지 마세요’막 이러거든요. 그래서 나 쳐다봤어요. 어떤 사람이 저렇게 노노싸움을 시키는가 뻔히 다 알고 있을 텐데 계속하는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어떤 인간일까 쳐다봤죠. 그래서 인상이 딱 남는 거예요. 기억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나는 딱 들었어요. 그래서 기억을 하는 거예요.


- 회사는 어려워서 정리됐다고 하지만 그 당시에도 보니까 한무남 씨는 뭐 땅도 사두시고 건물도 사두시고 부를 축적했더라고요.


어렵다 어렵다 아껴써라 물건 아껴써라 그 물건이 하나부터 휴지까지 다 미국에서 온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 물건도 아껴 써라 우리 어렵다 어렵다 그랬거든요. 물품도 잘 주지 않았었어요. 일종의 배급을 해주는데 그 쓰는 물건들을 갈수록 조금씩 주는 거예요. 그럼 한 번이라도 더 닦게 되고 그 화학물질 닦은 거 또 닦게 되고 노출이 되는 거잖아요. 근데 자기는 그렇게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거였죠. 우리는 그렇게 병들게 하고 저는 축적을 하고 있었던 거죠.


- 그렇게 했던 사장 한국 사장의 아들이 한동훈이라는 사실을 아셨어요?


우연 유튜브를 보고 알았는데 어느 날 사장 아들이 똑똑한데 고시에 합격했다더라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회사 내에서 딱 저는 들었던 생각이 ‘와 나는 꿈을 접고 이렇게 코 박고 납땜을 하는데 어느 집 자식은 참 그 나이에 최연소로 고시에 합격하는구나’ ‘참 누구는 그렇게 살고 누구는 꿈을 접고 이렇게 사는구나’ 되게 화가 났었죠. 근데 제 기억에 한 번 왔었던 것 같아요. 아빠 회사인데 고시 합격하고 나서 회사에 한번 아들이 왔단다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제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엄청 화가 났어요.


‘와 나는 내 꿈을 접고 이렇게 살고 있는데 어떤 놈은 저렇게 사는구나’ 그날 저녁에 그걸 보면서 천불이 나더라고 천불이 나더라고. 나의 피땀과 우리 노동자들의 피땀을 그 한동훈은 다 받고 산 거잖아요. 그런 아버지 만나서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 돈이 어떤 돈인지는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 돈이 자기가 먹고 그런 걸 누린 돈이 수천 명의 피와 땀 청춘 그 짓밟힌 그 청춘에 대한 대가라는 거, 한동훈 씨는 정말 알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래서 진짜 사과받고 싶어요. 내 몸이 내 몸이 너무 아프거든요.


- 그래도 그걸 그 세월을 버틸 수 있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우리 절대 떨어지지 말자 동지들하고 항상 손을 잡고 있었죠. 절대. 부모 가족보다 더 가깝게 지낸 사람들이 그 동지들이에요. 그러니까 저버릴 수 없었던 건 너무 나가고 싶고 지옥 같고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나 진짜 귀하게 자랐는데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근데 그 동지들을 저버릴 수가 없었던 거예요. 맞아 가면서 그 (울먹이며) 지키려고 했던 노동조합이 우리 목숨 같았거든. 그 동지들이 없으면 나도 죽고 너도 죽고 맞아도 우리는 사람이고 우리는 짓밟아도 지렁이도 꿈틀거리니 우리도 뭔가를 하겠다 절대 너희한테 지지 않겠다 끝까지 내가 지키겠다. 나도 사람이다. 나도 인격적이고 집에서 귀한 대접받은 그런 사람이다 너희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 아니다, 그 생각 가지고 동지들하고 손잡고 싸웠거든요. 그래서 힘들 때 그 생각해요 살면서 이제 뭐 힘들잖아요 내가 그것도 견뎌냈는데 이거 못 견뎌내겠냐 그런 생각하면서 살거든요


함께 힘든 시절을 버텨낸 동지들을 떠올리며 진달래 씨는 결국 눈물을 쏟았다.

진달래 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AMK. 화려했던 꿈은 물거품이 됐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고 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기르는 가치관을 정립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고 한다.


전라북도 진안, 마트도 하나 없고 배달음식 하나 시켜먹을 수 없는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이유도, 자칫 자신이 괴물을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였다. 땅을 밟고 자연의 섭리를 몸소 체험하면서 자본주의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라고 하니, 어쩌면 그는 여전히 기득권과 싸움 중이다. 외롭지만 행복한 길처럼 보인다.


- 그때 당시에 그게 이제 교육관까지 고민하게 했네요


바꿔놨죠. 아주 바꿔놨죠.


- 지금의 어떤 교육 시스템이 그때 당시에 어떤 노동자들끼리 이렇게 배신하고 잠깐의 이 얘기에 쫓아가고 공부만 잘하고 이런 아이들로 계속 키워가게끔 그렇게 시스템이 돼 있잖아요. 아이들을 키우는 데 있어서도 과감하게 그것을 ‘노’라고 외치고 다른 삶을 살고 있어요.


맞아요. 그러니까 아이들한테도 공부만 잘하는 건 안 된다. 공부만 잘하면 공부를 출세해서 남을 짓밟고 내가 뭔가 기회를 잡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그런 사람은 절대 안 된다 그러면 골고루 성장을 해야지. 그래서 문화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그렇게 키워야지. 공부 잘해서 내가 출세해서 뭔가를 해야지라고 하면 그거는 나는 윤석열이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진짜로 우리 아이들도 그걸 알아요. 그래서 이 아이들이 이렇게 제대로 볼 수 있는 시선은 아마 시골에서 자연과 더불어서 급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충분하게 우리는 또 텔레비전도 없고 이러니까 아이들한테 핸드폰이나 이런 거는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 때 사줬지 그전에는 안 사줬거든요.


그리고 그런 거를 좀 많이 못 보게 했고 그러니까 세월호라든가 이런 거 그리고 사회 문제에 대해서 계속 데리고 다니고 같이 얘기도 하고 그랬죠, 아이들 어렸을 때 계속 제가 데리고 다녔어요 그런 집회 현장에 시골이긴 하지만 계속 데리고 다녔죠 그리고 그 아이들 역할도 해주고


- 이렇게 시골에서 사시는 이유도 아이들에게 땅을 보고 자연을 보고


그렇죠 그렇죠. 제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될까. 그렇게 욕심 많고 뭔가 이렇게 탐욕스러운 세상에 안 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좀 더 느리고 세상의 원리를 알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내가 먹는 거 어떻게 자라는지 누가 어떻게 키우는지 그러니까 1년이 걸려서 나오는 거는 그 곡식들이 어떻게 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오는지 너희가 직접 해보고 너희가 키워라, 그러니까 애들이 힘들어하죠.


'모종 좀 그만 사오라' 그러고 '맨날 우리 풀 뽑아야 되냐'고 그리고 이제 재작년부터 논 농사를 지었는데 모판을 만들었어요. 볍씨를 뿌리고 흙 뿌리고 이렇게 해서 이렇게 모판을 만들면서 너무 애들이 힘들어했는데 한편으론 행복해 하는 거예요. 너무 너무 재밌어하는 거예요.


형제가 얼마나 재밌게 놀았는지 몰라요. 그 논에서 추수할 때 '이 쌀을 넌 누구 주고 싶니? 네가 고생을 했으니까 네가 주고 싶은 사람 몇 사람 짚어봐' 그랬더니 몇 사람 몇 사람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런 분들 다 갖다 드렸어요. 큰 아이 작은 아이 갖다 주고 싶은 분께. 주변에 자기 예뻐하시는 분 계시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했더니 받은 사람들이 너무 너무 고마워하는 거예요. 진짜 눈물이 글썽인 사람들도 있었어요.


-선생님이 가진 가치관이 많이 전파됐으면 좋겠다 그럼 우리 정말 살만한 세상 되겠다 이런 생각 오늘 많이 했거든요.


쉽지 않아요


- 내적 갈등이 많은 일인 것 같고


맞아요. 그런데 이제 너무 힘들 때는 다 날려요. 다 날리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요. 이게 할 건가 말 건가 해야 돼 그러면 그래 하자.


아이들도 친구들하고 갈등이 있으면 뭐가 문제인지 먼저 한번 얘기해 보자 엄마 이래 이래 이래 그래 그러면 네가 가서 사과를 받아 참는 게 아니다. 너도 너를 보여줘 친구 너로부터 너를 지키고 친구로부터 너를 지키고 너희 부모로부터 널 지켜야 된다. 부모라고 해서 모든 걸 다 허락하면 안 돼. 친구라고 해서 모든 걸 다 허락하면 안 돼. 네가 아닌 거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아니라고 얘기를 해야 되고 부모도 거부할 수 있는 건 거부를 해야 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랬더니 아이가 4학년 5학년 때부터 그렇게 하더라고요.


'세상이 바뀐다고, 네가 바뀐다고 나까지 바뀌어야 하나. '

유령같은 공장에서 나오라는 친구들에게 20살 진달래 씨가 했다는 말이다. 


'세상이 바뀐다고 나까지 바뀌어야 하나. '

자신의 이익을 쫓아 빠르게 변질되고 변해가는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우리를 향해 진달래 씨가 주는 일침이자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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