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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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 20:00:00

제주 4.3, 7만여 명 희생된 '한국 현대사의 비극'


제주 4.3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1947년 3월 1일 기념식에서 시작된 갈등이 1년 뒤인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이후 대규모 학살로 번져 7만여 명에 달하는 제주도민들이 희생됐다. 이 사건의 본질과 그 후유증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주 4.3의 시작과 전개


1947년 3월 1일 제주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도중 발생한 발포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민과 미군정, 그리고 한국 정부 간의 갈등이 시작됐다. 이후 1년간 지속된 갈등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인민위원회 주도의 무장봉기로 이어졌다.


당시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은 이를 '공산폭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다. 특히 1948년 10월 윤요조 연대장의 '초토화 작전' 이후 민간인 학살이 본격화됐다.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마을 거주민 전체를 '폭도'로 간주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7만여 명의 희생, 그 처참한 실상


제주4.3평화재단에 따르면, 4.3 사건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그 수가 7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희생자 중에는 노인과 어린이, 여성 등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특히 북촌리 학살 사건은 4.3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1949년 1월 17일 토벌대에 의해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이 집단 학살됐다. 이 사건은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4.3의 비극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됐다.


제주 4.3의 원인과 책임 논란


제주 4.3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좌익 세력의 무장봉기로 보는 반면, 다른 이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강압적 통치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저항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들은 당시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과잉 대응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10월 "제주도의 공산주의자들을 짓밟아 죽이라"고 한 발언은 무차별적인 학살의 빌미가 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긴 여정


제주 4.3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은 오랫동안 금기시됐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2000년 제주4.3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본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졌다.


2003년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됐고,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다. 이후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 절차가 진행됐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있다.


제주 4.3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장면이자, 냉전 시대 이념 대립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화해와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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