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사
[역사탐사 친일파 18] 반민특위 4호 김연수, 박정희 정부서 훈장 두 개
형 김성수는 1924년 동아일보 사설로 총독부에 항복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자치운동론으로 선회
식산조성재단으로 뺏은 땅, 식산은행 대출로 만주 진출
마닐라 함락 기념해 국방 자재비 10만원 기부
경성방직과 삼양사를 세운 수당 김연수는 1949년 2월 반민족행위자처벌법 4호 대상으로 체포됐다. 두 달 만에 풀려났다. 그 뒤 1971년 금탑산업훈장을, 1979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김연수와 형 인촌 김성수 형제의 행적은 17일 뉴탐사 방송에서 연도별로 정리됐다. 역사탐사 친일파 추적 18회다.
3·1운동까지 5년, 그리고 사설 한 편
형 김성수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에서 태어났다. 1914년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했다. 스물넷 때다. 1919년 3·1운동 때는 자기 집을 회합 장소로 내줬다. 같은 해 10월에는 경성방직을 세웠다. 1920년에는 양기탁과 유근, 설산 장덕수와 동아일보를 설립했다.
민족주의적 행보는 여기까지였다. 동아일보 창간 4년 만인 1924년 1월, 신문에 '민족적 경륜'이라는 사설이 실렸다. 춘원 이광수가 썼다. 1922년 개벽 5월호에 나온 '민족개조론'의 연장선이다.
사설에는 조선인이 결집하지 못한 채 위기를 맞았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 일제 아래에서라도 정치 활동을 시작하자고 했다. 밀자고 한 갈래는 셋이다. 정치적 결사와 물산장려를 위한 상업적 결사, 농촌 교육을 위한 교육적 결사다. 다만 정치적 결사 외에는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독립 노선을 접고 일제의 문화통치와 타협한 자치운동론이었다.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가 조선총독부에 항복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같은 무렵 조선일보도 비슷한 길로 가려 했다. 박헌영과 죽산 조봉암, 김단야 기자가 할복을 불사하겠다며 사주를 막아섰다. 당시 송병준 사장은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25년 뇌경색으로 숨졌다. 조선일보가 기자들에게 붙들려 있는 동안 동아일보가 먼저 무릎을 꿇은 셈이다.
이시영이 비운 자리를 채운 부통령
김성수는 1951년부터 이듬해까지 제2대 부통령을 지냈다. 자리는 국민방위군 사건에서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신성모 국방장관만 경질하고 물러나지 않자 부통령 이시영이 사퇴했다. 이시영은 닷새 동안 단식하며 항의했다. 그 빈자리를 이승만이 김성수로 채웠다.
김성수의 서훈은 2018년 취소됐다. 다만 고향 마을 도로명 '인촌안길'은 그대로다. 김성수는 1932년 보성전문학교도 인수했다.
땅은 재단이 뺏고 돈은 은행이 만들고
동생 김연수는 1896년 태어나 1979년 숨졌다. 호남 거부 김경중의 아들이다. 형 김성수가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제 사이는 벌어졌다. 김연수는 1927년 해동은행을 인수해 전무이사와 사장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조선식산은행 설립에 참여하고 조선식산조성재단 평의원도 겸했다.
두 기관의 역할은 갈린다. 식산은행에서 나오는 것은 현금뿐이다. 민족 자본가의 토지를 실제로 빼앗은 통로는 식산조성재단이었다. 빼앗은 땅은 대출이라는 형식을 거쳐 현금이 돼 돌아왔다. 세탁에 가까운 구조다.
부동산으로 흥한 나라인데 정작 수탈의 통로였던 이 재단은 교과서에서 빠져 있다. 지워진 자리에는 동아일보의 몫도 있다. 숫자가 뒤를 받친다. 1934년 경성방직은 설비를 세 배로 늘리고 만주로 나갔다. 자금은 식산은행 대출이었다. 같은 해 삼양사는 합자회사로 바뀌었고, 1939년 12월에는 봉천 남쪽에 남만방적을 세웠다.
만주 농장이 겨눈 독립군 자금줄
김연수는 만주 봉천에 출장소를 두고 잉커우에 천일농장과 반성농장을 운영했다. 독립운동 진영의 발해농장에 맞선 포석이었다. 같은 규모의 농장에서 같은 작물을 내놓으면 시세가 무너진다. 발해농장이 만주국에 농산물을 팔아 마련하던 독립군 자금을 말리려는 계산이었다.
기부 내역도 촘촘하다. 1938년 11월 만주 봉천 동광중학교와 일본 해군에 각각 1만원을 냈다. 1940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에 조선인 자제 교육비로 10만원을 기부했다. 같은 해 만주 하얼빈의 오리엔탈맥주를 인수했다. 이 회사가 형태를 바꿔 지금의 오비맥주가 됐다.
1942년 1월에는 일본군의 필리핀 마닐라 함락을 기념해 돈을 걷었다. 경성방직 4만원, 중앙상공 1만5000원, 삼양사 5000원 등 10만여원이었다. 명목은 국방 자재비였다. 당시 10만원은 지금 가치로 100억원쯤 된다. 화신백화점 박흥식과는 기부 액수를 서로 물어가며 경쟁했다. 누가 얼마를 냈느냐가 두 사람의 대화 주제였다.
1940년 9월부터 1942년 3월까지 김연수는 일본 정부가 주는 감수포장을 받았다. 1942년 11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후생부장을 맡았다. 이듬해 11월에는 최남선, 고원훈 등과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일정이었다. 1944년 11월에는 조선군 참모장 쓰지 마사노부가 주는 감사장을 받았다. 징병제와 학도지원병 실시에 협력한 공로였다.
후손들, 그리고 삼양라면은 다른 회사
김연수가 반민특위에서 두 달 만에 풀려난 데는 형 김성수가 손을 썼다. 당시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김연수의 아들 김상협은 문교부 장관을 거쳐 1982년부터 1983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상홍과 김상하는 삼양그룹 회장을 맡았다. 사위 송상현은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을 지냈고 고하 송진우의 손자다.
장관과 총리, 그룹 회장과 국제기구 수장이 한 집안에서 나왔다. 발버둥을 쳐도 기득권에 닿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자리와는 거리가 멀다.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김연수의 삼양사와 라면을 만드는 삼양식품은 다른 회사다. 삼양라면은 1964년 민족의 허기를 덜자며 나온 제품으로 김연수 계열과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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