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와 2024

CKEDWHE79A 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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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rother is watching you.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으니까... 미국 국가 보안국에서 일했던 에드워드 스노든은 2013년 영국 가디언지를 통해 미국의 정부 기관인 NSA가 전세계인들을 상대로 전화를 도청하고 어느 웹사이트에 접속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런데 이는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문장인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를 떠올리게 만들어 소름이 돋게 하는데...

여기서 잠시 이 두 숫자의 위치를 바꿔 본다. 1984→1948 이 책의 원고가 완성된 1948년이 된다는 것이다. 미래사회의 거대한 감시 권력의 상징 빅 브라더, 그의 지배 아래 자신을 상실해가는 인간들 사이로 인간성울 되찾고자하는 한 인물의 삶을 다루는 이 책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예견한 듯한 조지 오웰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우려했던 내용 중 많은 부분들이 스노든이 폭로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 <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를 통해 그 실체가 확인이 되고 있다는 건 참으로 우려스러운 부분이 아니라고 아니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야뇨증에 걸린 아이가 글을 쓰는 이유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뱅골주에서 1903년에 태어난 조지 오웰(본명 Eric Arthur Blair), 그의 아버지 리처드는 인도에서 근무하는 하급 공무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웰의 집안은 부유하지 못했고 영국으로 돌아가 시작된 그의 학교 시절 역시 가난 때문에 힘들었다고 한다. 조지 오웰이 8살이 되던 해 입학한 세인트 시프리언즈는 명문 학교였지만 등록금이 아버지 연금의 절반에 해당할 정도로 고액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린 오웰이 학업이 우수해 등록금을 면제 받는 장학생으로 추천을 받았다는 점에 있었다. 이렇게 입학한 오웰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이 때 그는 공부를 잘해야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다는 압박감 때문에 걸리지 않아야 할 야뇨증에 걸려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밤마다 오줌을 눈다는 이유로 교장한테 불려가 체벌을 받기도 헀다고 한다. 이때 8살 어린아이를 상대로 교장이 사용했던 그 회초리는 상아 손잡이가 달린 말채찍이었다고 한다. 교장은 8살 오웰의 목덜미를 잡아 엎어 놓고 때렸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 내 소수에 속했던 부잣집 아이들은 특별히 승마 레슨을 받았고 오전부터 비스킷을 먹는 특권을 누렸으며 어떤 경우에도 체벌을 받는 일은 없었다고 하는데, 이런 차별을 당하며 수치심을 느꼈을 어린 오웰은 "나는 저주 받았다." "나는 가난했고 나약했으며 못생겼고 인기도 없었다.""이 학교가 곧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라고 커서 얘기했다고 한다.

외톨이의 습관- 상상 속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불쾌한 일들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외톨이, 그래서 그는 혼자 상상 속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들고, 그들과 대화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고 한다. 상상했던 내용들을 글로 옮기면서 그는 자신에게 글재주와 더불어 불쾌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리해서 자신이 발견한 이 능력으로 자신만의 얘기를 만들면서 현실에서 실패한 자신을, 글을 통해 되찾곤 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오웰이 글을 쓰게 된 이유라고 한다.

불쾌한 사실과 글쓰기의 만남-조지 오웰의 문학 세계

가난한 외톨이였지만 불쾌한 사실을 직시한 채 글을 쓰는 재능이 있었던 조지 오웰, 여기서 그가 직시한 불쾌한 사실이란 학교라는 전체공간을 위해서 가난한 학생 한 명 쯤은 무시해도 좋다는 전체주의 적 분위기라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런 잘못된 현실을 직시하면서 성장한 조지 오웰의 글쓰기는 차츰 권력을 비판하고 이를 풍자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됐는데, 더군다나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는스페인 내전의 발발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독일 나치즘과 소련의 스탈린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전체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이런 현실을 침몰하는 배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당신이 침몰하는 배 위에 있을 때 당신의 생각은 오직 침몰하는 배와 관련한 것만이 된다"라고 그는 얘기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정치적 글쓰기를 하게 된 이유는 그 자신이 어린시절 가난이라는 차별 속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전체주의로 침몰하는 이 시대에 그 자신이 속해 있다는 것을 직시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해서 그는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이러한 자신의 글이 보도기사처럼 딱딱한 성격을 지니지 않도록 그는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밤마다 오줌을 누고, 말채찍으로 얻어 맞던 가난했던 한 아이가 그런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면서 이를 고발하는 정치적 글을 예술로 승화하겠다고 마음 먹은 그 순간 조지 오웰은 더이상 나약한 인간이 아닌 문학의 위대한 힘을 믿는 작가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렇게 말한다. "폭로해야 하는 거짓이 있기에, 사람들이 주목하길 바라는 사실이 있기에 나는 글을 쓴다."
이리하여 그는 여러 작품들을 발표했지만 특히 스탈린 전체주의가 어떻게 무너질 것인가 하는 것을 예견한 <동물농장>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로서 성공 후, 악화된 폐결핵으로 그는 각혈을 하기 시작했는데 무리를 할수록 생명에 지장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이 당시의 오웰은 휴식이라는 것 대신 다시 한 번 펜을 들었으니 이 시기 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쓰게 된 책이 <1984>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집필한 책이 바로 <1984>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니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자 했던 것인가? 이제부터는 그 핵심 메시지를 파악해보도록 한다.

1984

소설 1984에 등장하는 세계는 유라시아, 오세아니아 그리고 동아시아라고 하는 거대한 세개의 국가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데 절대 권력의 상징인 빅 브라더는 바로 저곳 오세아니아를 통치한다.

감시사회

그리고 이곳 오세아니아는 사람을 감시할 수 있는 텔레스크린이라는 기기를 카페, 식당, 가정집 곳곳에 설치해 놓고 있어서 이들의 사생활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데, 심지어 부부관계까지 파악하면서 당을 위해 아이를 낳을 목적 외에 단순 쾌락을 목적으로 한 관계를 금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숨막히는 감시 사회 속에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다. 본디 그는 외부 당원이라는 신분에 속했었는데, 빅 브라더를 최정점으로 하는 오세아니아는 전체 인구의 2%가 채 되지 않는 내부 당원이 당과 국가를 이끌며, 그 아래로 약 13%의 비율을 차지하는 외부 당원들이 내부 당원들의 지시를 받아 행정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85%가 프롤레타리아의 준말인 프롤이라 해서 단순 노동 업무를 담당하는 하층 계급으로 구성돼 있으니, 윈스턴은 외부 당원에 속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자아상실-당을 맹종하는 군중의 한 부분

이러한 윈스턴은 진리부라는 부서에서 일하며 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러니까 역사적 내용을 현재의 당이 원하는 방향으로 맞춰 왜곡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업무는 당의 슬로건 중의 하나인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기억, 사회가 남겨 놓은 기록을 조작하는 사회,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자신이 누군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으며 현재의 당이 주입하는 사상만을 따르는 그런 맹목적인 군중의 한 부분이 되고 만다.
이처럼 자아를 상실해 버린 감시사회 속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자기를 되찾고자 남몰래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가 일기장에 처음으로 쓴 내용이 1984년 4월 4일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윈스턴은 올해가 1984년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해 무력감에 빠져든다.
세상 모든 정보를 독점한 당이 날조해 버린 그런 정보만 얻어서 살고 있는 윈스턴에게 올해가 정확히 몇년도인지 그걸 알아 낼 방법은 없었으니 말이다. 즉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윈스턴이 쓴 일기장의 첫 구절이기도 한 <1984>는 구체적인 현실 속 특정 연도를 뜻하는 게 아니라 거대 권력의 감시 속에서 자아를 상실한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 바로 이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 이러한 시간은 반드시 저 소설 속에서만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거대 자본이 생산한 자극적인 정보들 가령, 연예인, 스포츠, 드라마, 게임과 같은 정보에 유독 과몰입하면서 비록 피곤할지라도 스스로 챙겨야만 하는 현실 속 자기의 삶을 외면해 버린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1984라는 숫자는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조지 오웰의 전체주의 그리고 무지라는 힘

본디 오웰의 작품 <1984>는 소련의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있기에 그의 소설을 반공주의 소설로 소개한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오웰은 그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밝혔으며 그가 비판했던 것 또한 사회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이 이름만 활용하는 변질돼 버린 전체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전체주의라는 것도 스탈린의 전체주의나 히틀러의 나치즘만을 뜻하는 게 아닌 훨씬 더 넓은 개념이었다. 이와 관련해 오웰은 자신의 에세이 <문학과 전체주의>를 통해 그가 생각하는 전체주의를 정확히 설명한바 있기도 하다.
"전체주의는 가능한 한에서 여러분들을 외부세계로부터 고립시키며 어떠한 비교 기준도 없는 인공의 우주 속으로 여러분들을 가두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웰은 개인의 사고를 지배하고 고립시키면서 그 사람의 고유한 감정마저 군중이라는 이름으로 가둬 버리는 이 모든 행동 양상을 전체주의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위험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작품 속 오세아니아에서 살고 있는 프롤(Proles) 계층의 사람들은 이런 위험을 직시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사상경찰들이 감시하지도 않고, 텔레스크린 속 감시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왜냐면 프롤들은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아서 스스로 생각하고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먹고 살기가 빠듯한 형편 때문에 당(黨)이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 따라서 당에서는 저들에게 스포츠, 범죄, 점성술과 관련한 기사들만 실리는 질 낮은 신문과 선정적인 소설과 영화를 제작해 비공식적으로 제공을 해주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윈스턴이 속한 외부 당원들에게는 철저히 금지된 것들이라는 점에서 당의 이러한 태도는 이중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프롤들은 질 낮은 교육과 가난 그리고 그 가난의 피로를 잊게 해 줄 오락에 빠져 살도록, 그렇게 해서 무지한 상태에 두면서 저들의 값싼 노동력만 활용하는 대신에 외부 당원에 속하는 윈스턴과 같은 인물들은 당의 행정 업무를 돕도록 지적인 사고를 어느 정도는 허용을 한다는 것 그 대신에 이들의 지적인 사고가 당의 비판으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 당원들과는 달리 프롤들은 당이 조성한 여건 속에서 스스로가 무지해졌다는 것인데 이러한 이들을 하는 당의 슬로건 중 하나가 '무지는 힘' (Ignorance is Strength) 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특권층에 속하는 내부 당원들, 이들이 누리는 힘을 지탱해주는 것이 바로 저 프롤들의 무지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는 과연 통제가 가능한가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궁금증에 빠지게 된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을 이 소설에 대입해 볼 때 나는 프롤에 속하는가 아니면 윈스턴처럼 의문을 품은 사람에 해당하는가이다. 프롤과 달리 세상의 진실에 질문할 능력이 있었던 윈스턴 스미스, 그는 일기를 쓰는 것과 더불어 줄리아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이를 정치적 행위로서 당에 일격을 가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골드스타인이라고 하는 위험 인물, 즉 당의 잘못을 처음으로 지적했다가 사형을 선고 받고 사라져 버린 이 인물을 추종하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겪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윈스턴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저 통제 사회가 Newspeak이라는 新語를 사용한다는 점에 잠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사상을 통제할 목적으로 고안된 새로운 언어인데 이 언어가 지니고 있는 특징이라고 하는 건 낱말의 개수를 최대한 줄인다는 데 있다. 가령 '좋은'의 반대말로 '안 좋은'이 있으므로 '나쁜'이라는 말은 굳이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니 없앤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빅 브리더에 반대하는 사람이 나온다 해도 빅 브라더는 나쁘다 라고 말할 수 없으며 빅 브라더는 안 좋다 정도로 말을 해야 함으로 세상을 보다 건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사임(Syme)은 '언어가 완성될 떄 혁명도 완성될 것'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는 마치 나의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했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떠올리게 만든다.
언어를 통제한다는 게 곧 인간의 사고와 세계를 향한 통제가 될 수 있다는 사임(Syme)의 저 생각은 이미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부정된 거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 본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특이하게도 유한한 숫자의 언어로 무한한 언어의 숫자를 창조해 내는 그러한 언어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는 노엄 촘스키라고 하는 학자가 <변형생성문법>이라고 하는 데에서 설명한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사용하는 낱말 수를 아무리 줄인다 해도 인간은 그 적은 수의 낱말들을 활용해 무한히 표현할 수 있는 낱말들의 세계를 창출해 낸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언어가 어떠한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논리에 앞선 폭력적 탄압-질문을 막기 위한 폭력

그러므로 언어를 통해 인간의 사고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저 오세아니아의 사회는 바로 윈스턴 스미스와 같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인 빅 브라더는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논리적인 답변 대신에 폭력적 탄압을 먼저 앞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늘날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 대부분이 여전히 폭력적 방식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을 앞세운 전체주의 또는 거대한 자본의 논리를 앞세워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적 사회 속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지는 힘이라는 당의 슬로건에 따라 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우리는 무지한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되는 걸까?

감시당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전락할 것인가, 인간의 사고를 고립시키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것인가.
어린 시절의 조지 오웰은 이와 비슷한 환경 속에서 과감하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고 죽기 직전까지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자 이렇게 <1984>를 썼다. 이제 이러한 조지 오웰의 문학 세계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지 답할 차례가 됐다.
→지혜의 빛 : 인문학의 숲

 

2024-07-17 13:3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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